호주 대학은 어디로 가는가?

호주국립대학교 舊 유니버시티 애비뉴

지난 7월, 남호주주(SA)의 애들레이드대학교(University of Adelaide)와 남호주대학교(University of South Australia)가 마침내 합병에 합의하면서 2026년에 ‘Adelaide Universit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번 결정은 남호주 소재 대학이 빅토리아주(VIC)나 뉴사우스웨일스주(NSW) 등에 위치한 대학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남호주에서 가장 큰 두 대학을 하나로 만듦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게 양 대학 지도부의 공통된 입장이다.

이번 합병 소식을 접하며 개인적으로 참담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교육 선진국을 자처하는 호주의 미래가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호주 유학을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돌아왔지만,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호주 유학을 권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합병 결정은 복잡한 계산과 치열한 이해관계의 조율을 거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몸집을 키워 세계대학평가 순위를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캐시카우나 다름 없는 국제학생을 유도해 학비를 거둬들여 다시 세계대학평가에 유리한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계산에 따른 결정에 불과하다. 이번 합병을 통해 애들레이드대는 7만 명 이상의 학생을 보유한 ‘매머드 대학’이 된다.

대학 합병 논의는 남호주 밖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호주주(WA)를 예로 들 수 있다. 현재 서호주에는 서호주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를 포함해 총 4개 종합대학이 존재하는데, 이들을 하나의 대학으로 통합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애들레이드대와 서호주대는 현재 호주 고등교육을 끌어가는 연구중심 대학 네트워크인 ‘그룹오브에이트(Group of Eight, Go8)’에 속해있는데, 서호주 역시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합병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합병을 바라보는 서호주 소재 대학들의 시각과 이해관계가 달라 실질적인 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애들레이드대가 합병을 통해 세계대학평가에서 당장 눈에 띠는 성과를 보이게 된다면 서호주에서도 합병 논의는 더욱 뜨거워질 게 뻔하다.

호주수도준주(ACT)에서도 과거 호주국립대학교(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가 캔버라대학교(University of Canberra)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합을 논하는 시기가 있었지만, 호주국립대의 강한 반발로 인해 무산됐다. 당시 호주국립대 지도부는 두 대학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통합은 옳지 않다며 점잖은 핑계를 댔지만, 실은 두 대학의 위상 차이와 당시 캔버라대의 재정문제가 반대의 이유였다. 최근에는 캔버라대와 2년제 직업전문학교인 캔버라공과대학(Canberra Institute of Technology)의 통합 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당장은 무산됐다.

대학 합병과 관련한 가장 최근 논의는 올해 7월 호주 연방 교육부가 발간한 보고서에 담겨 있다. 동 보고서는 자국 소도시에 위치한 소규모 지역 대학을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시스템과 유사한 ‘국립지역대학교(National Regional University)’ 시스템으로 통합할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물론 이 구상에 대한 관심은 아직 크지 않지만, 이 역시 애들레이드대 합병의 향후 성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호주 대학이 ‘규모적 성장’을 숭배하는 패티시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 괜찮을까?

나는 호주 빅토리아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Go8 대학 중 한 곳인 모나쉬대학교(Monash University)에 입학했다. 모나쉬대는 호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학으로 8만 명이 넘는 재학생을 보유하고 있다. 호주에만 네 개 캠퍼스를 두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에도 캠퍼스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나쉬대에서의 대학생활은 ‘최악’이었다. 넘쳐 나는 중국, 인도 학생들과 검증되지 않은 듯한 수준의 튜터, 도떼기시장식 수업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학생수가 많다 보니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와의 교류도 어려웠다. 들쑥날쑥하고 불투명한 대학입학등급지수(ATAR) 컷오프와 파운데이션 과정으로 인해 검증되지 않은 학생들이 무분별하게 캠퍼스에 발을 들였다. “모나쉬대가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명문대의 지위를 포기했다”는 비판은 (적어도 내 경험상) 정확하고 타당했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2012년 4월 자퇴했다. 이미 어마어마한 학비를 내고 많은 과목을 이수한 상태였지만, 단 한 번 있을 학부 과정을 이런 곳에서 끝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모나쉬대는 여러 세계대학평가에서 높은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교육 시장에서 규모의 힘은 분명 효과적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제학생을 유치하고 소위 랭킹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명문대’라는 타이틀을 부끄러움 없이 내걸고 있지만, ‘재학생 만족도’는 바닥을 친다. ‘규모의 힘’은 아시아 지역 국가에서 대입에 실패한 아이들에게 그럴듯한 도피처를 제공함으로써 연구에 쓰일 자금을 마련하는 데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질 높은 교육과 대학생활을 제공하는 데에는 분명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은 다른 주요 대학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고 있다.

호주에는 현재 41개 종합대학교가 존재한다. 그 외 직업전문학교에 해당하는 2년제 TAFE도 다수 운영되고 있지만,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대학(University)’이라는 개념을 그냥 마구잡이로 가져다 쓸 수 없어서 검증을 통해 종합대학의 자격요건을 충족한 경우에만 대학으로 인정받는다. 이 때문에 호주는 적은 수의 종합대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학교육의 경쟁력이 강한 국가 중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문제는 점차 대학들이 ‘규모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호주 상위권에 위치한 주요 대학들은 비정상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모나쉬대학교(86,000명), 시드니대학교(University of Sydney: 69,000명),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62,000명), 퀸즐랜드대학교(University of Queensland: 55,000명), 멜버른대학교(University of Melbourne: 54,400명) 등은 적게는 5만 명 이상, 많게는 8만 명이 넘는 학생을 보유하고 있고 그 수는 꾸준히 증가세를 보인다. 이번에 합병을 결정한 애들레이드대도 매머드 대학이 될 것이기에 Go8에서는 호주국립대와 서호주대만이 소규모 대학으로 남아 있다. 만약 서호주 소재 대학들이 단일 대학으로 통합된다면 호주국립대를 제외한 Go8은 사실상 매머드 대학들의 모임이 되는 것이다.

웨슬리(Michael Wesley) 멜버른대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호주 전체 대학의 재학생 총원을 대학 수로 나눠 평균을 구할 경우 각 대학은 약 36,500명의 학생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같은 계산법을 미국과 영국에 적용해보면 각각 13,740명과 4,500명이 나온다. 호주 대학에서 평균적으로 재학생 만족도가 낮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생-교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충분한 교류를 통한 학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노던준주(NT) 소재 찰스다윈대학교(Charles Darwin University)의 학생-교수 비율은 충격적인 수준(36:1)이다.

모나쉬대, 시드니대, 뉴사우스웨일스대, 퀀즐랜드대, 멜버른대 등은 모두 통근형-도시 거점 대학(commuter, state-based university)이다. 다시 말해 각 주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대학으로서 과거 한국의 지방 거점 국립대와 비슷하다. 예컨대 빅토리아주에서 12학년을 졸업한 다수가 멜버른대나 모나쉬대 중 한 곳을 선택해 입학하고,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는 시드니대와 뉴사우스웨일스대가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웨슬리 교수는 이미 많은 학생수로 인해 재학생 만족도가 낮은 매머드 대학이 통근형 대학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재학생은 일시적이고 거래적인(fleeting and transactional) 캠퍼스 경험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지적한다.

반대로 미국과 영국의 주요 대학들은 기숙형 대학(residential university)으로 재학생에게 친밀하고 몰입 가능한(intimate and immersive) 대학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만족도 역시 높다고 본다. 물론 미국의 아이비리그나 영국의 옥스브리지 등은 호주의 주요 대학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학생을 가지고 있다.

최근 세계대학평가에서 성적 상승을 경험한 호주 상위 대학들은 하나 같이 웹사이트에 낯간지러운 슬로건과 순위를 내걸고 국제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멜버른대 총장은 자신이 졸업한 캐임브리지대 시절의 경험을 상기하며 “일류 대학이라면 재학생에게 깊이 있는 지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갈수록 몸집을 키워가는 멜버른대가 과연 재학생 다수에게 두루 깊이 있는 지적 토대를 제공할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웨슬리 교수는 호주에서 소규모 기숙형 대학은 호주국립대가 유일하다고 말한다. 호주국립대의 풀타임 재학생수는 약 17,000명이며, 학부생은 1만 명이 조금 넘는다. 학생-교수 비율은 11:1로 호주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 그렇다면 호주국립대 재학생 만족도는 어떨까?

나는 모나쉬대를 자퇴하고 약 3개월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수도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대에 입학했다. 부끄럽게도 당시 호주국립대를 선택한 이유는 세계대학평가 순위였다. 내가 호주에서 12학년이던 2007년 호주국립대는 QS-Times 세계대학평가 기준 16위 대학이었다. 나 역시 여느 빅토리아주 12학년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거주지와 가까운 멜버른대와 모나쉬대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지만, 자퇴 후 높은 순위를 자랑하는 ‘명문대’를 가고 싶은 마음에 호주국립대에 발을 들였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세계 16위라는 성적은 객관적인 수치도 아닐 뿐더러 연구성과에 따른 평가 결과라는 점에서 학부생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당시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이후 학생신문 WORONI가 호주국립대를 “세계 16위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대학”이라 비판하는 기사를 접하곤 내 결정의 동기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호주국립대는 적어도 내 경험상 순위와 상관없이 명문대로 불리기 충분했다. ‘작은 대학’은 여러모로 매력적이었다. 처음 캔버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학교 담당자가 직접 마중을 나와 기숙사로 모셔다 주는 서비스부터 인상 깊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소규모 기숙형 대학에서나 맛볼 수 있는 캠퍼스 경험과 ‘교육의 질’이었다. 호주국립대는 재학생 다수가 캠퍼스에 거주한다. 학생수는 적지만 캔버라 액튼에 있는 단일 캠퍼스의 면적은 호주에서 가장 크다 보니 학생에게 제공되는 편의시설과 공간은 항상 여유로웠다. 강의 규모는 모나쉬대에 비해 확연히 작았고, 튜토리얼은 10명을 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수가 적기도 했고 또 ‘Open Door Policy’에 따라 교수들은 항상 연구실 문을 열어둬야 했기 때문에 교수와의 교류가 편리하고 마음 편했다.

웨슬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호주국립대는 호주 대학 중 유일하게 통근형 대학이 아니다. 이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 대부분은 다른 주나 해외 출신이다. 특히 자신이 살던 주를 벗어나 이 곳에 입학하는 현지인에게 이 대학은 그저 집에서 가까워 가는 곳이 아닌 ‘집 떠나 올 만한 이유’가 있는 곳이기에 신입생의 평균 대학입학등급지수도 호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해오고 있다.

호주국립대는 ‘작은 대학’을 지향한다. 몸집을 키우면 세계대학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규모의 힘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대학 지도부는 세계대학평가가 대학의 자율성과 순기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세계대학평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학을 운영하지 않는다. 연구성과의 양적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원주민학(First Nations Studies) 연구에 투자를 확대하는 조치만 봐도 이 대학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내년 초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슈미트(Brian Schmidt) 교수는 규모의 유혹을 뿌리칠 용기가 있었다. 물론 몇 가지 정책에서 욕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학 규모를 키워 정원을 늘리고’ → ‘국제학생에게 문턱을 낮춰 학생수를 늘리고’ → ‘거기서 걷어 들인 학비를 연구성과로 전환하고’ → ‘연구성과의 양적 수치를 높여 세계 순위를 높이는’ 비겁한 수법을 거부했다는 것 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총장이었다.

슈미트 총장은 작은 규모를 지향하되 공동체의 다양성은 중요하게 여겼다. 임기 중 그는 중국에서 오는 도피성 국제학생들의 대학 내 비율을 낮추기 위해 여러 의미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대학 산하의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이 먼저 문을 닫았다. 현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식도 대폭 바꿔 학과별 컷오프를 충족하는 것 외에도 교외 및 대외 활동 기록 역시 요구하기 시작했다. 공부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검증할만한 경험을 쌓아왔는가를 중요하게 평가하기 위함이다. 또 선발 과정에서 내국인과 외국인 지원자의 출신 배경(국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점수를 부과해 최대한 다양한 배경의 학생을 받으려 하고 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지만, 건강하고 우수한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합병을 통해 규모의 힘에 의존하려는 호주 대학들이 점점 늘어난다. 아예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비싼 학비를 써주시면 세계대학평가 순위를 높여 당신과 당신의 부모를 만족시켜드리겠다”고 홍보한다. 유학원의 입을 빌려 QS, THE, US News 같은 편향되고 모순적인 세계대학평가를 앞세워 도피성 국제학생을 유혹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비록 당신은 모국에서 대입에 실패했지만, 교육의 선진국 호주에서 세계 20~50권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으니 두 번 고민 말고 어서 오시라”고 말한다. 학위장사의 꾐에 빠져 무턱대고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문제다. 문턱이 없다시피 한 대학에 돈을 앞세워 발을 들이는 유학생들은 어느새 명문대생 정체성을 체화하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학교를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천하기가 짝이 없다.

호주국립대도 슈미트 총장이 물러나고 나면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모르겠다. 모교가 앞으로도 ‘규모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10년 전 슈미트 교수가 총장직을 맡기 이전에 “호주국립대의 미래”를 주제로 가진 강연이다. 현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

ANU Reporter, “The life of Brain.” (December 19, 2023). https://reporter.anu.edu.au/all-stories/the-life-of-brian

Australian Financial Review. “Transactional not transformational: the rise of the mega university.” (June 23, 2023). https://www.afr.com/work-and-careers/education/transactional-not-transformational-the-rise-of-the-mega-university-20230616-p5dh3c

Sydney Morning Herald. “Global rankings are distorting universities’ decisions, says ANU chief.” (November 11, 2020). https://www.smh.com.au/national/global-rankings-are-distorting-universities-decisions-says-anu-chief-20201111-p56do9.html

Gavin Moodie. “A national university for regional Australia isn’t necessarily a smart idea. Here’s why.” (August 8, 2023). https://theconversation.com/a-national-university-for-regional-australia-isnt-necessarily-a-smart-idea-heres-why-210909

WA Today. “‘It’s the academic Hunger Games’: The for and against on WA universities merger idea.” (August 17, 2023). https://www.watoday.com.au/national/western-australia/it-s-the-academic-hunger-games-the-for-and-against-on-wa-universities-merger-idea-20230816-p5dwyg.html

Murdoch University. “WA universities not in decline.” (August 22, 2023). https://www.murdoch.edu.au/news/articles/wa-universities-not-in-dec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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