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서의 사진에 대한 소고


1. 문득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벌써 꽤 많이 찍었구나’ 싶은 생각에 조금은 뿌듯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이 새삼 크게 와닿는 아침이다. 동시에 카메라, 렌즈, 필름, 현상 등에 들어간 돈이 상당한 걸 다시 한번 깨닫곤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바로 지웠다. 그럼에도 카메라는, 사진은 좋은 취미다.

2. 누굴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내가 담고 싶은 대상을 조금 더 오래 더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취미였다. 때문에 멋진 사진은 거의 없다. 누구나 담을 수 있는 장면과 대상을 담았기에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얻은 기쁨과 곧바로 잊혀졌을 일상의 박제된 흔적이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3. 사진을 PC에 저장해두고 이따금 꺼내 볼 방법이 있음에도 공개된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아온 것은 종종 나를 궁금해하는 몇몇 지인의 궁금증을 해소해드림과 동시에 내 오래된 수집욕구와 정리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의 흔적을 정리해두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의 정체성이 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렴 어떠하리-

4. 최근 필름사진을 몇 롤 찍을 여유가 생겼다. 바르낙 IIIg와 IIf, M3 DS, 캐논 P에 감도 400짜리 컬러 필름과 흑백 필름을 넣어 여기저기 다녔다. 미리 쟁여둔 필름이 꽤 있어 ‘찍어야지 찍어야지’ 하면서도 바쁜 와중에는 노출계 없는 필름카메라로 34~36컷을 찍는 게 부담스러워 근래엔 디지털 바디와 올드 렌즈의 조합만 고집했었다. 그러다 학기가 마무리되고 당장 듀데이트가 임박한 원고도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필름에 눈을 돌렸다. 큰 가방을 들지 않아 나갈 때마다 두 대씩 챙겼고, 황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지만, 그래도 카메라와 사진은 좋은 취미다.

5. 요즘은 흑백사진에 빠져 지낸다. M10에 삼반 주마론 같은 올드 렌즈를 함께 사용하면서 흑백사진 찍는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됐는데, 최근 다시 필름카메라를 들게 되면서 흑백 필름의 그레인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M10을 팔아버리고 새롭게 영입한 M10-R로 담아내는 흑백사진에 대한 기대가 커 날씨만 좀 좋아지면 마음에 담아둔 곳에 가 몇 장 찍어볼 생각이지만, 그래도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이나 애착은 필름사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6.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와 수동 렌즈의 조합 역시 중독성이 강하다. 초점과 노출값을 잡아내기 위해 작지만 단단한 올드 렌즈를 이리저리 조작하는 과정이 즐겁다. 나처럼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찍는가’의 문제만큼이나 ‘무엇으로 찍는가’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디지털 바디를 쓸 땐 항상 후면 디스플레이를 아예 꺼버리고 뷰파인더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다. 좀 더 아날로그한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사진 찍는 행위의 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라이카 디지털 바디를 사용하며 디스플레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M10-D 매물이 장터에 올라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사라지나 보다.

7. 눈알이 아플 정도로 찬란한, 살인적인 화소수를 가진 일본제 DSLR로 뽑아내는 디지털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귀신같은 보정 기술도 거북하다. 포토샵을 할 줄 모르기도 하지만, 보정된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 수평을 맞추는 것을 제외하곤 어지간하면 사진을 뜯어고치지 않는다.

8. 새 사진을 찍기 위해 둥지 주변 가지를 다 쳐내고 본드로 새 다리를 나무에 접착한 또라이의 이야기, 특정한 나무를 찍기 위해 주변 나무를 베어낸 또 다른 또라이의 행적을 두고 보면, 사진은 그냥 가벼운 취미일 때 가장 순수한 것 같다.

9. 애증의 미니룩스 줌을 시작으로 좀 진지하게 카메라와 사진을 취미로 한지 어언 2년이 다 되어간다. 여전히 노출이 어렵고, 화각도 어렵다. 눈이 나빠 안경을 쓰는 탓에 뷰파인더를 통해 초점 잡기도 쉽지 않다. 좀 더 이른 나이에 시작했더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