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윤석열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을 통해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을 홍보하고, 아세안(ASEAN)과의 협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한-아세안 연대구상’을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이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국제적 입지를 견고히 하고 그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국제협력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인도-태평양’ 개념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동맹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를 강화하고, 그 안에서도 중추국가로서 그 나름의 위상과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적인 우방국과의 협력을 넘어서는 국제협력을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점에서 동남아 지역을 간과하지 않은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은 목표설정에서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물론 동남아 지역과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러브콜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당장 지난 정부에서도 아세안과의 협력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신남방정책이라는 것이 추진된 바 있다. 다만 현 정부의 전략은 대중국 봉쇄와 견제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동맹 네트워크에 참여를 결정한 상태에서 여전히 미중 양자택일을 회피하고 있는 아세안과의 협력을 추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 정부의 정책과 차이를 가진다. 아세안과의 협력은 한국이 지향하는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을 실현함에 있어 꼭 충족되어야 할 조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아세안을 포섭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이라는 것을 앞세워 미중 양자택일의 순간을 가능한 한 유보하고 있는 아세안 국가들은 국제정치에서 주로 부동국가(swing states)로 분류된다. 아세안 중심성은 강대국 경쟁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지정학적 중심성을 유지함으로써 일차적으로 경쟁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고 나아가 국제적 가치를 높이려는 전략적 사고가 반영된 개념이다. 미국과 중국이 이들 국가를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지원을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성과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세안의 이 같은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아세안 부동국가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동남아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 감소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연루되는 것을 회피하는 차원에서 아세안 차원의 ‘인도-태평양 전망(outlook)’을 따로 발표하였다. 2018년 들어 중국 통신기업 화웨이(Huawei)에 대한 미국 주도의 퇴출 운동이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던 시기에도 아세안 국가들은 미국에 부분적으로 협조하거나 아예 협조를 거부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행보를 보이며 반중국 전선에 쉽사리 참여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권 아래 미국을 경시하고 중국을 중시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기까지 했다.
아세안 국가들을 부동국가로 만드는 아세안 중심성의 또 다른 이름은 ‘실용주의(pragmatism)’다. 일례로 아세안 국가 대부분이 화웨이 사태 당시에 보였던 행보는 실용주의 또는 실리주의 외교에 가까웠다. 미국의 동맹국임에도 필리핀은 중국이 제공하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최대한 끌어오기 위해 화웨이 퇴출을 거부하는 친중 행보를 보였고, 미국의 우방국으로 알려진 싱가포르도 화웨이를 배제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수용하지도 않은 채 5G 장비 공급업체의 다양화를 모색하는 공급자 다각화(multi-vendor) 전략을 전개함으로써 양자택일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나 중국의 경제 보복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즉 미중 사이에서 가치나 원칙보다는 국익을 최우선시하며 이를 최대한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실용주의 외교를 택한 것이다.
아세안 부동국가의 이 같은 특성을 고려할 때, 중추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이 아세안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놓고 있는 ‘민주주의’, ‘규칙기반 질서’, ‘항행의 자유’, ‘인권’ 등의 가치를 똑같이 앞세우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 전술한 가치들은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의 수단이자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될 가치이지만, 민주주의나 인권 등은 중국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아세안 국가들이 대놓고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운 가치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아세안 국가들이 부침을 겪는 이슈를 파악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틈새외교(niche diplomacy)를 지향해야 한다. 아세안 국가들이 부침을 겪는 대표적인 이슈 분야로 해양 안보가 있다. 이들 국가는 동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직접적 또는 잠재적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당사국이다.
물론 아세안 국가들이 해상에서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하여 단순히 중국위협론에 올라타 중국과 이들 국가 간 관계의 단절을 유도하는 전략은 피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제시한 ‘항행의 자유’가 중국과의 분쟁 해결을 의미하기보다 분쟁의 심화를 의미한다는 점을 이들 국가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 이들 국가가 암초를 두고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었던 당시에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유보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아세안에게 있어 미국의 안보 공약은 아직은 신뢰하기 어려운 약속에 가깝다. 무엇보다 아세안 국가 중 하나 또 그 이상이 미래에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군사적 마찰을 겪게 될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중국위협론을 앞세워 아세안을 포섭하려는 시도는 여러모로 전략적이지 못한 선택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대아세안 정책은 해양에서 발생하는 비전통 안보 문제들에 집중하여 협력 증진을 모색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예컨대 초국적 인신매매, 난민, 해적, 환경오염, 재난, 마약 및 무기 밀매, 불법 어업 등과 관련한 분야는 당장 미중 전략경쟁의 연루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슈 분야라는 점에서 아세안 국가들의 협조적 태도를 유도하기 상대적으로 더 쉬울 수 있다. 더욱이 이 같은 비전통 안보 이슈들은 모두 초국적 위협으로서 아세안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아세안 차원에서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이며, 중국과의 영토분쟁과 같은 전통안보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비전통 안보 이슈 분야를 대상으로 전개되는 한국의 틈새외교는 원칙과 가치보다 실리를 먼저 추구하는 아세안 국가들로부터 환영받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일본, 호주 등 인도-태평양 지역 부국들은 이 같은 비전통 안보 위협 대응에 필요한 ‘정보-감시-정찰(ISR)’ 역량에서 부침을 겪고 있는 아세안 국가들에게 ISR 관련 자산을 적극적으로 제공해오고 있다. 미국 역시 동남아 지역 해양능력배양을 위한 지원을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은 아세안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환영받는 분위기다. 한국 역시 아세안의 해양능력배양에 초점을 맞춘 외교를 전개한다면 아세안 국가들을 포섭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중심의 동맹 네트워크 안에서도 그 위상과 역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험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세안의 해양능력배양을 위한 자산 공여가 앞으로 미중 경쟁의 새로운 영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ISR 자산 등의 공여를 통해 미국과 아세안 국가 간 관계 개선이 가시화될 경우 중국 역시 해당 분야에서 아세안에 대한 공여를 대폭 증대할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나 한국이 안고 가야 할 민주주의나 인권 등의 가치가 아세안 차원에서는 충분히 공유되기 어렵다는 점이 중국에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양과 같은 질의 공여가 이루어진다면, 아세안 부동국가들은 민주주의나 인권 등 부담스러운 가치나 원칙을 강조하지 않는 중국을 더 편리한 공여국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아세안의 실용주의 외교를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끝/
벽진이씨 서울화수회지 『碧珍』제16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