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달갑지 않은 일들에 마음도 착잡하고 짜증도 나고 해서 그냥 잊어버리고 싶어 오랜만에 니콘 F를 꺼내봤다.
역시 후지산을 모티브로 한 삼각뿔 파인더를 얹은 니콘 F는 라이카가 주지 못하는 만족감을 선사하는 정말 멋진 카메라다. 출시 당시 ‘Leica Killer’라고 불릴 만큼 인기가 굉장했다고 한다. 최근 니콘에서 FM2를 모티브로 한 미러리스 카메라를 내놓아 재미를 좀 봤다고 하는데, 차라리 F 디자인을 모티브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수려한 외모로 보자면 니콘 어느 카메라도 시조 격인 F만 못하다. 라이카도 최초 M바디인 M3를 내놓은 이후로 그보다 못한(못생긴) 후속작만 줄줄이 내놓았다는 점에서 사정은 비슷하다. 1959년에 나온 디자인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엣지 있는 외관을 자랑한다.


니콘 F는 에디션을 제외하곤 크게 기본 버전과 그보다 더 늦게 출시된 ‘아폴로(Apollo)’ 버전이 있는데, 셀프타이머와 와인딩 레버에 플라스틱 커버가 장착되어 있는가 없는가를 제외하곤 다른 차이는 없다(아폴로 버전의 시리얼 번호는 ‘7335000’ 부터 시작한다). 상태에 따라 가격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아폴로 버전이 더 비싸다.
기본 버전 중에서 아주 초기에 나온 바디의 경우엔 상판에 ‘Nikon’이 아닌 ‘일본광학(NIPPON KOGAKU TOKYO)’ 마크가 각인되어 있다. 종종 일본광학 마크 각인의 초기형이 귀하다며 더 높은 값을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날로그 필름카메라에 대한 취향 문제이니 그걸 납득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냐마는-
기본 버전과 아폴로 버전에 상관없이 블랙 페인트가 실버 크롬보다 가격이 더 높게 형성되어 있다. 황동이 슬슬 드러나 보이는 블랙 페인트 바디는 두 말할 것 없이 매력적이지만, 실버 크롬 바디도 포기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워 하나만 택하기 어려운 카메라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니콘 F의 내구성과 기계적 완성도는 라이카 못지않게 높다. 종군기자용 카메라로 이름을 날릴 만하다. 파인더도 시원시원해 촬영이 편하다. 필름사진을 찍고 싶지만 라이카를 구입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완전기계식 바디에 관심이 있다면, FM2보다 더 견고하고 클래식한 바디를 원한다면 F나 그 후속작인 F2는 정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처음 구한 F는 지금은 사라진 회현지하상가의 세일카메라에서 구입한 아폴로 버전의 크롬 바디였다. 지금도 보유한 F 바디 중 가장 좋은 개체인 만큼 당시 평균적으로 형성된 값의 약 2배 정도 되는 비용을 치르고 데려왔던 녀석이다.
고향집에 있었더라면 마당을 쓸거나 나무를 정리하거나 잔디밭에 잡초를 뽑거나 하면서 기분전환을 했겠지만, 너저분하고 시끄러운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재미라곤 이렇게 카메라나 가지고 노는 게 전부이다. 술담배도 하지 않고 게임이나 모여 하는 운동도 질색하는지라 그나마 이런 취미라도 있는 게 정말 다행이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