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평화(emerging peace)란 무엇인가? 일찍이 갈퉁은 ‘소극적-적극적 평화’ 논의를 통해 전쟁/평화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평화를 해하는 폭력을 크게 직적접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 등 세 가지로 구분함으로써 의도적인 가해자가 있는 모든 물리적, 언어적, 심리적 폭력을 포괄하는 직접적 폭력의 부재로서 ‘소극적 평화’를, 전쟁 부재의 상태를 넘어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없는 상태로서 ‘적극적 평화’를 제시하였다. 한편 보울딩, 조지, 카코위츠, 쿱찬 등 일련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평화를 ‘불안정한 평화’와 ‘안정적 평화’로 범주화함으로써 전쟁/평화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평화 논의는 분명 평화를 단순하게 전쟁의 부재로만 보던 시각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출현하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동학과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였음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최근 소수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신흥평화의 논의는 평화가 발현하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적 시각을 제시한다. 신흥평화에 대한 논의는 아직 매우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단일한 시각을 기초로 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복잡계에서 말하는 창발(emergence)의 개념과 논의를 빌려 평화를 설명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신흥평화의 논의에 앞서 등장한 신흥권력(emerging power)이나 신흥안보(emerging security)의 논의가 모두 복잡계의 창발 메커니즘을 수용하여 이론으로 정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신흥평화의 논의 역시 ‘창발하는 현상으로서의 평화’의 개념을 담는다. 물론 신흥평화의 창발성에 대한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먼저 신흥평화가 신흥안보처럼 ‘창발하는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수 있고, 그와 반대로 신흥평화를 신흥안보의 반대 개념으로 봄으로써 신흥안보의 창발이 역으로 나타나 안보의 요소나 메커니즘이 감소하는 현상으로서의 평화를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자는 평화를 새롭게 발현하는 현상으로 본다면, 후자는 신흥안보의 ‘창발의 양질전화-이슈연계-지정학적 연계의 사다리’ 가장 하부에 자리하는 상태로서 평화를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필자는 전자의 논의 선상에서 신흥평화가 새롭게 창발하는 현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쟁/평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평화의 논의는 필연적으로 새롭게 출현하는 현상으로서의 평화 개념을 모색해야 한다. 평화를 안보의 요소나 메커니즘이 감소하는 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소극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갈퉁의 적극적 평화는 정의, 통합, 조화, 협력 등 적극적인 아이디어들을 중심으로 출현하고 구축되어야 하는 개념으로서 평화를 제시하였다. 장기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평화를 안정적 평화와 불안정한 평화로 구분한 보울딩의 평화론에서도 불안정 평화는 ‘전쟁 가능성이 있지만 평화가 규범으로 여겨지고 전쟁은 평화의 규범이 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 즉 규범으로 부상하는 현상으로서 평화를 이야기하였다. 안정적 평화의 과정을 이야기한 카코위츠의 ‘평화의 공고화’ 역시 평화를 보장하는 규범들이 발전하는 단계를 의미하며, 쿱찬의 화해, 안보공동체, 연방 등 평화의 출현 조건으로 거론된 것들 역시 제도화된 국제레짐, 양립 가능한 사회질서, 문화적 공통성 등 새롭게 출현하는 평화의 요소들에 주목하였다.
복잡계의 창발성에 주목한 존슨에 의하면, 창발이란 구성요소가 개별적으로 갖지 못한 특성이나 행동이 구성요소들이 모인 전체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다. 복잡계에서는 하위수준(구성요소)에는 없는 특성이 상위수준(전체구조)에서 창발하는 현상은 자기조직화 능력에 의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저차원의 법칙에서 고차원의 복잡계로 발전하는 창발성에 의한 상향식 조직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똑똑한 수뇌부가 아닌 비교적 우둔한 대중의 힘에 의해 조직되는 복잡계의 탄생 과정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복잡계는 국지적인 법칙을 따르는 다수의 행위자가 ‘속도 조정자(pacemaker)의 명령’이나 상부의 지시가 아예 없거나 그에 둔감한 상태에서 다중의 방식으로 역학적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새롭게 조직되는 체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국지적인 법칙의 조건인데, 창발적 체계가 되먹임과 같은 학습을 통해 조직화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미시적 차원에서 상호작용하는 다수의 행위자가 저차원의 규칙을 엄격히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미의 개미 집단 창조의 예를 들어 본다면, 개별 개미는 전체 상황을 모르는 채로 서로 협동하는 과정을 통해 개미 집단을 탄생시킨다. 그 과정에서 개미는 국지적인 정보, 즉 이웃 개미의 행동과 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을 통해 국지적 ‘되먹임(feedback)’을 하고, 이러한 국지적 되먹임이 집단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분권적 질서로서 개미 집단이 형성된다. 또 다른 예로, 도시는 도시 거주자 각각이 저차원의 규칙을 따르는 상태에서 이웃 간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영향을 받는국지적 상호작용의 관계, 즉 ‘쌍방향 연결 되먹임’ 속에서 발현하는 창발적 체계로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 상태가 아니다. 동시에 안보 요소가 감소한 상태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데, 이는 안보 요소가 어느 수준까지 감소해야만 이를 평화 상태로 규정할 수 있을지 측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안보 위협은 실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안보의 대상(referent object)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위협일 수도 있는 것처럼, 평화를 안보 위협을 구성하는 요소의 감소 상태로 볼 경우, 안보 요소가 거의 부재에 가까울 만큼 감소하였다고 하더라도 평화의 대상이 이를 주관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이를 평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안보요소가 다분한 환경에 놓인 개개인이 상대적으로 평화롭다 느끼거나 안보 위협에 불감한 현상, 또는 평화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나 질서가 수립된 상태에서도 개개인이 안보 위협을 느끼는 상태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복잡계의 논의는 창발하는 현상으로서 평화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복잡계는 인간행동을 설명함에 있어 거시에서 미시로서의 적절한 환원(reduction)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복잡계의 논의를 원용한 신흥평화론은 미시적 차원의 인간이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느끼는 평화가 무엇인지, 인간들이 미시적 차원에서 벌이는 상호작용이 어떠한 평화에 대한 인식과 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포착하는 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복잡계 논의는 단순히 미시적 수준의 개체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의 개체 또는 구성요소와 거시적 차원의 전체 간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안보/평화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이나 감정 또는 담론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안보/평화 환경과 어떠한 인과관계를 가지는가를 포착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미시적 차원의 되먹임에 해당하는 대중의 평화 인식이나 담론 또는 활동이 거시적 수준의 평화로 이어지거나 또는 이어지지 못하는 요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또 한번 은유로서 표현한다면, 골목에서 대중이 갖는 평화 인식이나 담론 내지는 활동이 대로에서 이루어진 평화와 상충하거나 합치하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복잡계 논의가 주는 힌트가 있는 것이다.
한편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능력과 창발의 메커니즘은 안보 위협을 구성하는 요소나 메커니즘의 감소 상태로서 평화를 보는 시각을 뛰어넘어 새롭게 조직화되는 상태로서 평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다. 평화의 요소로 언급되는 규범, 국제레짐, 사회질서, 문화적 공통성 등은 모두 융합이나 제도화 등의 메커니즘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들로서 필히 평화의 대상이 되는 다수 간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평화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 또는 지도층이 선포하거나 일련의 조약, 정책, 법제 등을 추진함으로써 달성되는 상태가 아니라 평화의 대상이 되는 대중이 직접 인식하고 느끼는 상태로서 형성되는 상태라고 할 때, 대중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는 쌍방향 연결 되먹임이나, 다수에 의한 평화 담론이 미시적 차원에서 거시적 차원으로 조직화되는 현상 등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라 소위 ‘상전이’를 맞이하여 평화 상태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아무리 미시적 차원에서의 대중 간의, 시민사회 간의 상호작용이나 연결성이 증대하더라도 국가나 정부 등 속도 조정자의 평화적 행태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평화의 창발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잡계 논의에서도 저차원의 규칙, 국지적인 법칙 등 특정한 속도 조정자가 개입할 필요성을 인정할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국가나 정부는 미시적 차원의 다수 행위자가 엄격히 따를 수 있는 저차원의 규칙을 설정하고 제안하는 속도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복잡계의 자기조직화와 창발의 논의가 신흥평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또 다른 지점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제시되는 미시적 차원의 상호작용에 특정한 이념, 세계관, 도덕성 등을 부여하거나 이와 연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혼종적 평화(hybrid peace)’에 관한 논의에 따르면, 평화 거버넌스는 비자유주의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규범, 제도, 행위자 등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규범, 제도, 행위자 등과 병존하며 상호작용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수립되고 작동한다. 이러한 논의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한데,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목격되는 평화는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 간 화합과 융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등의 이념 또는 가치와 거리가 먼 국가 또는 사회 간에서도 얼마든지 수립될 수 있고, 또 역사적으로도 수립되어왔다. 권위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평화 상태는 이룩되기 어렵다거나, 권위주의 국가나 사회 간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시각은 지극히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복잡계의 논의에서 미시적 차원의 상호작용은 수뇌부의 명령이 아닌 대중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상부의 지시가 없거나 둔감한 상태에서 다중의 방식으로 역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제시하는 특정한 이념, 세계관, 도덕성 등에 기초한 정책에 의해 통제받는 상호작용이 아님을 의미한다. 상향식 조직화는 대중의 힘에 의해 창발성이 저차원의 법칙에서 고차원의 복잡계로 발전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상향식 조직화에 의해 나타나는 신흥평화는 이를 구축하는 데 요구되는 정의, 통합, 조화, 협력 등의 아이디어나 제도화된 국제레짐이, 양립 가능한 사회질서 또는 문화적 공통성 등이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주입되는 특정 이념에 구속받는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물론 미시적 차원에서 다수 행위자 간 상호작용이 특정 이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거나, 평화의 조건인 문화적 공통성이나 사회질서가 특정 이념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창발하는 현상으로서 신흥평화는 혼종적 평화의 논의가 강조한 ‘혼종성(hybridity)’을 수용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신흥평화는 기존에 제기된 소극적-적극적 평화론, 안정적 평화론, 혼종적 평화론 등을 아우르는 평화 개념으로서 자리잡을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