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리차드 하스(Richard N. Haass) 미국외교협회 회장과 찰스 쿱찬(Charles A. Kupchan) 조지타운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The New Concert of Powers’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의 패권이 사라진 미래 국제체제의 청사진을 아주 흥미롭고도 도발적으로 그려냈다. 저자들은 국제체제가 미국의 지도력을 회복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이념을 아우르는 다극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전환의 시기에 동반되는 격동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전쟁의 위협을 완화할 수 있는 대안책으로 19세기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를 모티브로 한 새로운 강대국 협조체제 구축을 제시했다.

저자들에 의하면, 강대국 협조체제는 정치적 포용성(political inclusivity)과 절차의 비공식성(procedural informality)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져야 한다. 먼저 정치적 포용성은 협조체제가 국내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지정학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중국, 유럽연합, 인도, 일본, 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 및 연합체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참여국 간 이념적 차이나 국내정치체제의 차이가 국제협력을 저해하는 것을 예방하는 데 필요하다. 두 번째 특징인 절차의 비공식성은 법적 구속력을 동반한 강제적 절차나 합의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UN안보리가 상임이사국 간 갈등 상황에서 잦은 비토 행사로 인해 마비되어버리는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따라서 협조체제는 참여국들이 합의 구축을 위한 회유와 다툼을 가질 수 있는 사적인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지정학적 차이와 이념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저자들은 협조체제가 UN과 달리 의사결정을 위한 조직체가 아닌 협의를 위한 조직체로서 기존의 규범과 제도들을 심의하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규칙을 만들거나 공동 이니셔티브를 지원할 수 있으나, 문제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활동은 UN을 비롯한 기존 국제기구들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가장 상위수준에 존재하는 대화의 장으로서 국제체제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현존하는 국제기구나 협의체 등을 대처하기보다 이들이 실행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주는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강대국 협조체제는 본질적으로 권력 중심적이며, 특정 이념, 가치, 정치체제 등에 기초한 원칙, 규범, 제도 등을 배제한다. 이 점에서 하스와 쿱찬은 협조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열강들이 세계 GDP와 군비지출의 약 70%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를 공동으로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앞서 거론된 다섯 강대국과 유럽연합 외에 아프리카연합, 아세안, 아랍연맹, 미주기구 등 지역 기구들이 정식 참여국이 아닌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협조체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협조체제는 동시에 철저히 국가 중심적인데, 과거 19세기 유럽연합과 마찬가지로 영토적 현상유지와 국가주권에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권이 도전받게 되는 상황은 오직 군사개입 등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국제적 합의가 뒷받침될 때이다. 하스와 쿱찬은 협조체제의 이러한 권력-국가 중심적인 특성으로 인해 참여 강대국 간 위계나 안보 등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핵심 이익-주권과 영토 등-이 위협받지 않는 이상 직접적인 전략적 대화를 통해 국가 간 신호전달이 더욱 명확해질 수 있으므로 특정 국가의 일방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 무력다툼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스와 쿱찬이 그리는 강대국 협조체제는 분명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진다. 먼저 UN 등 현존하는 국제기구와 제도들이 갖는 비효율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대안이 될 여지가 있다. 또한 미중경쟁의 갈등수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과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을 고려할 때, 미중 간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줄이는 매력적인 응급처방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좋든 싫든 미국 패권 주기의 하강국면과 중국의 부상이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다극체제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면, 자유민주주의와 비자유민주주의가 병존하는 다극체제를 가장 빠르게 안정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강대국 중심의 협조체제는 본질적으로 비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배제하며 기능한다. 저자들은 이 협조체제가 개별국가의 주권을 강하게 옹호한다는 점에서 비강대국의 승인을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일찍이 미중 전쟁 발발을 막는 방법으로 아시아 협조체제(Concert of Asia) 구축을 호소한 호주의 전략학자 휴 화이트(Hugh White) 호주국립대 교수가 주장한 바와 같이, 강대국 중심의 협조체제는 중견국이나 약소국 등 비강대국의 희생을 요구한다. 최근 미국의 반중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규칙기반 질서 보호를 핵심 국익으로 내걸고 있는 국가들이 그러한 행태를 보이는 이유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데 미국 주도의 질서가 가장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강대국 협조체제가 비강대국의 승인을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미중 간 권력공유(power sharing)의 실현 가능성에 있다. 강대국 협조체제의 기본 조건은 하락하는 패권국과 부상하는 도전국 간 권력의 공유이다. 즉 미국이 중국과 좁게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넓게는 글로벌 차원에서 중국과 패권을 공유해야만 하며, 중국 역시 미국의 양보를 존중하여 적어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리더십을 미국과 함께 행사하길 원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 내에서 중국과의 권력공유는 강경파와 온견파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구상이다. 중국의 전략적 야망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패권에 맞춰져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스와 쿱찬 역시 미중 콘도미니움(condominium)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중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상호 관계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미중 간 권력공유는 하스와 쿱찬이 거론한 다른 참여국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일본은 미국이 중국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오랫동안 경계해왔다는 점에서 강대국 협조체제의 전제조건을 수용하길 꺼릴 수 있다.

그럼에도 하스와 쿱찬의 강대국 협조체제 구상은 국제협력의 필수조건으로서 정치적 포용성을 강조함으로써 국가 내부 정치체제와 이념에서 발견되는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