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960년대 초기는 한국이 전략적 외교를 전개했다고 평가받는 시기이다. 1961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는 냉전이라는 환경 속에서 국내적 불안정과 북한의 위협 그리고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라는 대내외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러한 구조적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략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이 직면한 대외적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박정희의 한국은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파병외교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공산권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지켜내는 데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 파병은 한국의 전략적 외교가 분명히 드러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목표를 파악함으로써 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의 필요성을 미리 포착하고 미국에게 먼저 파병을 제안하는 주도적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된 시점에 다른 자유진영 국가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지원을 이행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안보적 약속과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한일국교정상화의 경우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통합전략에 맞춤에 따라 한국과 일본 양국에게 관계정상화를 집요하게 강요한 끝에 얻어진 미국 주도적 정책에 의한 결과이지만, 그 이면에는 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국력증진에 필요한 경제적 원조를 얻어내고 더 나아가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을 얻어내려는 박정희 정권의 전략적 목적의식과 노력이 존재했다.

이 두 사례에 관한 기존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의 사례를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함에 따라 이 두 사례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결과로 본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분석은 이 두 사례에서 드러나는 한국의 외교를 냉전체제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한 약소국의 합리적 행태로 보거나, 단순하게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 결과물로 봄으로써 약소국의 종속적이며 수동적 외교정책으로 본다(빅터 차 1997). 따라서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파병외교에서 나타나는 한국의 외교를 미국의 전략적 필요와 이익을 위해 진행된 종속적 외교정책의 하나로 평가한다. 그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당장의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국가적 자존심을 내다 버린 국가적 실수이며, 베트남전 파병외교 역시 미국의 정권 승인과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한국 청년들을 미국의 ‘청부 군대’로 보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한 패착으로 그려진다(Otis 1972; 이동욱 2000).

또 다른 하나는 당시 한국의 외교를 행위자를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두 사례에서 드러나는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를 조명한 것이다. 즉, 60년대 초기 박정희 개인 혹은 그의 정권이 한국의 안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였고 그에 따라 어떤 전략적 구상을 했는가에 주목한 시도이다(신욱희 2010; 김형아 2005). 현실주의적 시각을 원용한 기존 연구들이 60년대 초기 한국의 외교가 국가의 위상을 떨어트린 실책이었다는 부정적 인식을 불러일으키거나, 그 당시 한국이 냉전이라는 구조 내에서 주체적인 외교를 전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제시한다면,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에 주목한 분석은 당시 한국의 외교가 단순히 냉전이라는 구조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그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글이 담고 있는 연구 역시 이러한 행위자 중심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파병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의 60년대 초 외교전략은 단순히 구조에 의해 결정된 국가의 합리적 행위로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에 이끌린 약소국의 수동적 외교로 보기도 어렵다. 예로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먼저 베트남 파병 의사를 전달했으나 오히려 미국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11월 존슨 행정부가 출범해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정책을 전개하면서 1964년 베트남에 대한 우방국들의 참전과 협력을 요청하면서부터이다. 따라서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는 박정희 정권 혹은 개인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도 역시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이를 한국의 국익이 보장되는 방향에 맞춰 이용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전략적 사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는 당시 한국이 약소국의 제한된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인 외교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국익의 증진을 이뤄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 두 사례에서 드러나는 한국의 전략적 외교가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위협인식과 그러한 인식에 기초한 전략적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전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의 사례를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 구상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재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한국이 처해있던 상황을 검토함으로써 당시 한국의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초기 한국이 처해있던 구조적 상황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여기서 구조적 상황이란 넓은 의미에서 냉전체제라는 구조적 환경을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구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시 한미관계에 대한 미국과 한국의 정부 문건을 검토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개별 행위자로서의 당시 한국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의 외교가 박정희 개인의 결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선 ‘위협’과 ‘국익’에 대한 박정희의 인식을 파악해야 하므로 박정희의 대통령 연설문과 자서전 그리고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한 문헌들을 검토할 것이다.

외교정책의 개인심리적 요인의 영향

이 글은 외교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에서 지도자 개인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 변수에 주목한다. 따라서 이 글은 로이드 젠슨이 외교정책의 개인적 영역, 그중에서도 특히 개인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분석한 연구를 원용하여 1960년대 초기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가 외교정책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검증하고자 한다.

젠슨에 의하면, 정책결정자 개인의 심리는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이며 특히 다음의 조건에서 개인심리적 변수의 영향력이 커진다.

  1. 외교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자의 관심이 클수록 외교정책에 미치는 개인심리적 변수의 영향력은 커진다.
  2. 정책결정자 개인이 가지는 결정에 대한 재량권이 클수록 개인성격의 영향은 커진다.
  3. 외교정책의 결정 구조상 정책이 결정되는 단계가 높을수록 개인 성격의 영향력은 커진다.
  4. 개인성격의 변수는 표준운용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s)의 적용이 어려운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더 중요해진다.
  5. 상황이 모호하거나 돌발적인 경우, 혹은 상황에 대한 국내적 반응이 정책결정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개인성격 변수의 영향력은 커진다.
  6. 상황에 대한 정보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을 경우, 개인성격 변수의 역할은 더 커진다.
  7. 현안을 다룰 때보다는 장기적인 목표에서 정책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개인심리적 변수의 영향력은 커진다.
  8. 특정 문제에 대한 외교정책이 국가 안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으로 여겨질 때, 정책결정자는 자신의 개인심리를 외교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것을 자제한다(젠슨 1994: 28-36).

이 글에서는 젠슨이 제시한 여덟 가지 조건 중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조건에 주목하여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를 설명하고자 한다. 1960년대 초기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박정희는 외교문제,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또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가 정책 결정에 있어 거의 독점적인 결정권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당시 한국의 외교정책은 민주적인 상향식 방법보다는 국가 권력 구조의 최상층부인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결정됐으며, 쿠데타가 발생하고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외교정책 결정의 표준운용절차라는 것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 개인심리적 변수의 역할과 영향력이 항상 큰 것은 아니다. 정책결정자 개인의 성격과 심리적 요인은 국가 내 하위 행위자들의 강력한 저항, 제도적 규제, 관습, 국제적 압박 등에 의해 주로 제한된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는 1960년대 초기는 박정희 개인의 심리적 변수가 외교정책 결정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조건이 갖춰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5.16 쿠데타가 한국의 내부적 권력구조에 대대적인 전환을 일으킴에 따라 국내적 저항이나 국가의 제도적 규제 혹은 관습 등의 요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정책결정자 개인의 위협인식과 전략 구상이 외교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외부적 압박 역시 박정희 개인의 심리적 변수가 한국 외교를 결정하는 데에 별다른 제약을 걸지 못하였는데, 유일하게 한국 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미국 역시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를 눈감아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의도하진 않았으나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가 한국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 1960년대 초기 한국을 둘러싼 안보 환경

1960년대 초기는 흔히 냉전이라는 용어를 통해 쉽게 설명된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 구조는 미소 간 냉전체제의 논리에 따라 공산주의 진영 대 자유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아시아 안보 환경은 단순히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대립으로만 보기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물론, 미국-일본-한국이 소련-중국-북한과 군사적 대립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은 맞지만 진영 내부적으로도 완전한 협력과 신뢰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자유진영의 경우,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미 간 갈등이라는 내부적 변동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내정치적 변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한편 쿠데타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입장을 표했다. 한편 그러한 혼란의 중심에 있던 한국은 국내적 상황과 더불어 주적과의 군사적 대치 그리고 심지어 우방과의 갈등에도 직면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은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있었다. 내부적으로는 1961년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가 전환이 이루어졌고, 외부적으로는 쿠데타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와 더불어 공산진영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박정희 군부는 물리적 힘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데에 성공하였지만, 쿠데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미국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김일영 2004: 317-318). 특히 한국 내 미국 포스트는 쿠데타가 미국과 어떤 사전 협의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에 대해 불쾌한 심정을 보였는데, 쿠데타가 발생하자 마셸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 대리대사는 장면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표했고Telegram from the Commander in Chief, U.S. Forces Korea (Magruder)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May 16, 1961, FRUS 1961~1963 Vol. XXII. pp.450~451., 매그루더(C. B. Magruder) 유엔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자신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침해라고 비난하면서 한국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김일영 2004: 322).

미국의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는 한국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변동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러한 행동은 당시 한국의 국내적 변화가 미국의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파악하는 과정에서 분명한 입장표명을 자제한 것일 뿐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미 국무부는 주한 미 대사에게 장면 내각의 회생에 역행하는 모든 행위를 금할 것과 더불어 만약 장면 내각이 무너질 경우를 대비해 사태가 명확해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관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Telegram from the Department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May 16, 1961, FRUS 1961~1963 Vol. XXII. pp.454~456. 물론 미국은 장면 내각이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신속히 박정희 군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역시 미국에게 우의와 협력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한편, 박정희 개인의 공산주의 연루 이력 역시 한국 군부에 대한 미국의 신뢰 구축을 방해했다. 미국은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판결까지 받았던 박정희를 처음부터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특히 박정희가 1961년 7월 혁명정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 장성 40명을 숙청한 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김형아 2005: 126-127). 냉전이 한창이던 상황과 더불어 전략적 요충지인 한국이 쿠데타로 인해 내부적 격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역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했다(김형아 2005: 126-127). 이렇듯 후견국 미국과의 신뢰 관계가 흔들린다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경제적 지원이 없이는 국가존립을 보장할 수 없던 한국에게 국가적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쿠데타로 인한 한미관계의 위기를 차치하더라도 60년대 한국의 안보 위기는 북한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군사력은 한국과 비교해 그 규모가 컸으며, 특히 60년대 초부터 북한은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고 빠르게 군사력을 증강했다(김보미 2014). 이렇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자체적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대한국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을 경계하며 한국군이 공격능력을 갖추게 될 시 한반도에서 위기가 다시 고조되리라 판단하였고, 그에 따라 한국군의 현대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다(오원철 1999: 370). 즉, 60년대 한국의 자체적인 국방력이 약했던 것은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미국의 억지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단순히 군사력 차이의 문제를 떠나 당시 북한이 가진 의도 역시 한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초중반에 들어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전략적 방기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의 위기를 고조하는 군사적 모험주의를 감행하고자 했다(모춘흥, 은용수 2016).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는 1960년대 후반에 들면서 1.21 북괴군 청와대 기습 사태, 미 첩보함 푸에블로(Pueblo)로 나포 사건,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을 통해 가시화되었지만, 그러한 군사적 도발에 대한 구상은 6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방은 한미동맹을 통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 아래 보호받고 있었지만, 미국의 대한국 원조 정책이 군사적 원조에서 경제적 원조로 전환될 가능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보적 차원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대한국 원조 정책의 초점을 군사력 증강이 아닌 사회적·경제적 안정에 맞춰 이를 전개하고자 했는데, 워싱턴의 이러한 정책 전환에 따라 5.16 쿠데타 발생 한 달 전인 4월에는 퇴임을 앞둔 미국대사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가 한국의 발전이 군사적 차원이 아닌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시급하다는 메시지를 미 정부에게 전달했고(김형아 2005: 151-152), 4월 버거(Samuel D. Berger) 신임 주한 미국대사 역시 한국군 감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Presidential Task Force Report, Korea: General, 5 June 1961, JFK Library. 미국의 이러한 한국군 감축 의지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게 크나큰 안보적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시점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 역시 한국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한일관계는 미국을 매개로 하여 매우 제한된 협조 단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한일국교정상화의 표면적 노력은 박정희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점까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애초에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일본 역시 한국과의 긴밀한 연대를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총 다섯 번에 걸친 한일 회담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한일 양국 모두 상호관계 개선에 대한 정치적 의지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김형아 2005: 169). 따라서 60년대 초 양국 간 관계는 여전히 원활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단절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한일관계의 연대성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0년대 말부터 한일국교정상화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중요한 한 축이었고, 그에 따라 미국은 한일 양국에게 관계 개선을 지속해서 요구했다(김일영 2004: 362-363; 김형아 2005: 168-169).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중개는 한일간 감정의 골을 메우지 못했고, 특히 강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을 설득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케네디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냉전 체제하에 일본을 더욱 강력한 반공 파트너로 삼길 원했던 미국은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지역적 역할을 극대화하고 더 나아가 대한국 원조의 부담을 일본과 나누어지길 희망했다. 그러한 정책 기조에 따라 미국은 후견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한일 양국에게 하루빨리 양자 관계를 회복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이도성 1995: 249-253).

한일국교정상화는 1961년부터 박정희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금씩 가능성을 키워가다가 1965년에서야 정식 체결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국교정상화가 타결된 시점까지도 한국민에게 일본이란 지역적 협력국이라기보다는 경계의 대상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일본에 대한 당시 한국민의 전반적인 인식이 어떠했는가는 1964년 박정희의 「한일회담에 관한 특별담화문」에서 한일회담에 대한 국내적 반발이 국익 증진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식의 내용만을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대통령공보비서관실 1964c).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한국의 외교정책

전술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한국의 외교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전환적 사건은 단연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얼핏 보면 미국이라는 후견국의 정책에 따라 피후견국 한국이 수동적 외교를 전개한 사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한국의 외교가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한국의 배타적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자주적 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두 사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한국의 자발적인 의지가 반영된 외교정책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라는 파격적 외교행보가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선 먼저 60년대 초 박정희가 인식한 위협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그가 구상한 전략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국내정치적 안정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특히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반공을 국가 기조로 삼을 만큼 공산주의의 위협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1964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처음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그는 한국이 이겨내야 할 국가적 난제로 공산주의, 가난 그리고 비자주적 국민성을 뽑았다(대통령 비서실 1994a). 같은 해 UN데이 담화문에서도 박정희는 공산주의의 침략 위협이 극동에 상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대통령 비서실 1964b). 1962년 출판된 그의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도 역시 북한에 대한 박정희의 위협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처한 현실은 최악이다. (생략) 밖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침략 위협이 불안을 가속화시키는 중이다. (생략) 어느 누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다시 침략할 야욕과 계책을 버렸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북한에 대한 자신의 위협인식을 드러냈다(박정희 저, 남정욱 편 2017a: 28-29).

이러한 위협인식을 토대로 박정희는 베트남전 파병이 한국에게 세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는데, 이는 한미관계의 개선, 한국군의 현대화 그리고 막대한 경제적 보상이었다(Woo 1991).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세 가지 목표가 모두 한국의 안보 증진과 직결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1961년 방미 중 케네디를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에 병력을 파병할 의사를 전달하였고Memorandum of Conversation, Pak-Kennedy, 14 November 1961, FRUS 1961~1963 Vol. XXII. pp.536-537, 이후 1962년 3월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이던 애버릴 헤리먼(Averill W. Harriman)이 방한하였을 때에도 역시 같은 제의를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김형아 2005: 178-179). 사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대한 우방국들의 지원을 요구하지도 않은 시점에 한국군의 파병을 제안한 것은 국내적 여론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행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미국에게 먼저 자발적으로 파병 의사를 밝힌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주한미군의 감축을 심각하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이 감축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한국의 안보가 더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했다(김형아 2005: 177).

한편,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의 지속적인 한국군 감축 의지 역시 박정희 정권의 안보위협 인식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의 한국군 감축 요구는 1963년 케네디와 김정렬 당시 주미 한국대사의 면담에서 잘 드러난다. 이 면담에서 케네디는 한국의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군의 감축을 고려해 볼 것을 제안하였고, 김 대사는 ‘그러한 조치는 북한과 휴전선을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답했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Kennedy and ROK Ambassador Kim, 17 June 1963, FRUS 1961~1963 Vol. XXII. pp.650~651. 이렇듯 주한미군 철수설이 끊이지 않고 또 미국의 한국군 감축 의지가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파병 외교는 국내적인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특히 전투부대를 파견하면서부터 여론과 야당의 반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파병에 대한 국내적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한일국교정상화가 한국 내 가장 큰 정치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정작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반대여론이 비교적 더 확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김일영 2004: 367). 두 번째 이유는 베트남전 파병이 한국의 배타적 국익 증진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파병 외교가 시작된 60년대 초 한국에서는 높은 실업률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는데, 파병은 한국 내 유휴인력의 소모와 이를 통한 외화벌이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실업률을 감소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김일영 2004: 370-371). 또한, 한국의 파병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기로 한 점과 파병의 대가로 한국 기업과 노동자가 베트남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점 역시 직접적인 국가이익의 형태로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얻은 큰 성과 중 하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이며, 이는 1966년 공표된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1981). 이 각서를 통해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와 더불어 한국의 대간첩 활동능력 향상을 위해 지속해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고, 한국의 수출 진흥을 위한 기술 원조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차관 제공 역시 약속하였다.

2. 한일국교정상화 사례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미국의 집요하고 강력한 요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외교정책에 한국의 주체적 사고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한일국교정상화에 관한 한국의 외교정책 결정 역시 박정희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친일파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박정희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들끓는 반일감정이 국내 여론을 휩쓸어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도 왜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집요하게 밀어붙였을까?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자신이 이끄는 세력의 정당성, 즉 대내외적 인정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쿠데타의 비합법성에 대한 국내적 반발은 쿠데타 주도 세력이 갖가지 정치적 추문과 연루됨에 따라 국민적 신뢰를 급속히 잃어가면서 거세지기 시작했다(김일영 2004: 335-336). 한편, 국내적 안정을 위한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외부적 압박 역시 거셌는데, 가장 큰 압박은 혈맹 미국으로부터 전해졌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의 쿠데타를 눈감아주면서도 박정희 군부에게 조속히 민정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였고, 만약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시 경제적 지원이 중단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Macdonald 1992: 217). 당시 한국의 국방비가 거의 미국에게 의존된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중단은 한국의 안보 이전에 박정희 자신의 정치적 생존에 대한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쿠데타 세력의 정권이양 문제와 상관없이 미국은 60년대에 들어 한국에 대한 원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박정희가 케네디를 예방한 자리에서 케네디가 미국이 지고 있는 원조에 대한 부담감을 이야기했던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Pak-Kennedy, 14 November 1961, FRUS 1961~1963 Vol. XXII. pp.536-537.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60년대 초기에 들어 엄청난 폭으로 감소하였고, 특히 1963년 2억만 달러를 넘던 액수가 바로 1년 뒤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상황으로 이어졌다(Han 1978: 59). 이렇듯 미국의 원조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 즉 자금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필요를 다름 아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충족하고자 했다. 박정희의 이러한 인식은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 자금이 필요하다. 미국이 도와준다고 해도 원조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이 당당히 받아낼 돈이 있지 않은가(이도성 1995: 32)’.

만약 한일국교정상화가 온전히 미국의 강요에 의한 한국의 어쩔 수 없는 수동적 외교의 결과라 주장한다면, 박정희가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활동들은 도저히 설명되질 않는다. 1961년 11월 6일 박정희는 방미를 코앞에 둔 시점에 이케다 일본 수상에게 친서를 보내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자신의 분명하고도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11월 11일에는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다시 한번 국교정상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이도성 1995: 34-36). 한편, 1963년 출판된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일본의 성의 있는 자세와 태도를 바란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박정희는 일본에게 과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반성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지급되길 요구하기도 하였다(박정희 저, 남정욱 편 2017b: 189-191).

베트남전 파병과 비교할 때 한일국교정상화는 극심한 반발을 겪었는데, 이는 한일관계의 감정적 골이 제대로 메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국민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 국가 주권을 포기하는 정책, 단순히 경제적 이익 논리만으로 결정된 정책이라는 식의 비난 여론이 전국을 휩쓸었고 전국적인 조약 반대시위가 주요 도시에서 발생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64년 5월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선언하는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는가 하면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범국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가 경찰력과 무력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었다(김영일 2004: 362; 김형아 2005: 17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협약 체결을 밀어붙였는데 이는 미국의 압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정희가 한일관계 개선이 한국에게 군사적·경제적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은 미국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1964년 10월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과 윌리엄 번디(William Bundy) 미 차관보가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번디 차관보는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지속될 것을 분명히 하였다(한영구 외 2003: 21). 실제로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의 결과로 주한미군의 감축 중단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는 한편, 미국의 경제적 원조가 빠르게 감소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냈다. 물론, 주한미군의 감축 가능성과 일본 보상금 액수의 문제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문제시된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당시 한국에게는 주한미군 감축과 미국의 원조 감소가 가장 큰 국가적 난제였고, 한일국교정상화는 그러한 난제들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다.

맺음말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의 외교는 약소국의 외교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이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보여준 협상 태도는 후견국을 상대로 한 피후견국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이 글은 1960년대 초기 한국 외교에서 발견되는 주체성의 근원을 박정희라는 정책결정자의 개인심리적 요인에서 찾고자 하였다. 1960년대 초기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미국의 원조 감축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감과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위협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위협인식은 대내외적으로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박정희와 그의 정권으로 하여금 전략적인 외교를 전개하게끔 했다.

박정희가 추진한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가 장기적으로 한국의 국익에 기여했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큰 문제이지만, 적어도 그가 주도한 외교전략이 1960년대 초기 쿠데타로 인한 국내적 혼란과 미국의 원조 감소 그리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만들어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의 안보를 증진하는 데에 어느 정도 이바지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비대칭적 동맹 구조 내에서 미국의 정책에 무작정 끌려가기보다는 그 정책에 깃든 미국의 이해관계를 파악해 이를 한국의 국익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전략적 사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적 사고가 한국을 둘러싼 안보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위협에 대한 박정희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처럼 지도자 개인의 위협인식과 전략적 사고가 외교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60년대 초기 한국의 상황처럼 비민주적이고 비정상적인 환경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60년대 초기 박정희의 외교전략이 오늘날 한국에게 주는 함의가 꼭 크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한국의 외교정책은 60년대 초기에 비해 훨씬 더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제한된 국력과 지정학적 한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지도자 개인의 심리적 요인과 거기서 기인한 전략적 사고에 따라 그 국가의 외교정책이 일정 수준 주체적 성격을 가지고 전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이 글이 주목하는 한국의 60년대 초기 두 외교정책 사례는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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