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 현실주의(Subaltern realism) 시각을 처음 소개한 국제정치학자 모하메드 아윱(Mohammed Ayoob)은 주류 국제정치이론들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고 강대국 중심적인 배경 속에서 탄생해 발전되어옴에 따라 국제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국제정치적 현실과 안보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왔음을 비판한다. 국제정치이론의 불평등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략하게 정리되는 그의 주장은 주류 국제정치이론들이 현대 국제체제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무력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패해왔으며, 또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국가 다수의 대내외적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데에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Ayoob 2002).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윱은 기존 이론들의 강점을 부분적으로 원용하여 제3세계 국제정치 현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보완적 시각(perspective)으로서 서발턴 현실주의를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서발턴 현실주의가 정의하는 안보의 대상(referent object of security)과 위협의 범위(scope of threat)에 특히 주목하여 어떤 국가가 서발턴 국가로 분류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윱에 의하면, 서발턴 현실주의는 제3세계 국가들을 위한 국제정치적 시각으로서 세계 주변부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국제정치적 현실과 그들의 이해관계 및 안보적 위협인식을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분석의 대상을 제3세계 국가군으로 제한한 것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론이나 중견국 외교론처럼 특정 국가군의 외교적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국가들 다수가 제3세계 국가, 즉 서발턴 국가라는 점에서 국제정치이론의 고질적인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서발턴이란, ‘하위계층’ 혹은 ‘하위주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아윱이 의미하는 서발턴은 국제체제 내에 존재하는 국가 중 아직 국가형성 과정 중에 있는, 그래서 대외적인 위협보다는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된 국가를 뜻한다(Ayoob 1995).
서발턴 현실주의가 기존 주류 국제정치이론들과 가장 뚜렷한 차이를 가지는 부분은 위협과 안보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전통적인 주류 이론들의 시각에서 볼 때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는 국제체제의 급변이나 강대국 정치 등에 의해 발생하는 무력충돌 혹은 ‘밖으로부터의 압박과 공격’이지만, 서발턴 현실주의의 시각에서는 국가형성을 방해하는 문제들이 안보위협으로 여겨진다. 즉, 국가형성 과정에 있는 국가의 영토와 제도 그리고 지배세력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안보문제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아윱은 안보를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말해, 안보는 철저히 국가안보(state security), 혹은 국가의 정권 안보(regime security)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정의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비정치적 영역, 예컨대 경제나 환경 등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안보위협의 지위를 얻기 위해선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위협하는 문제이어야만 한다.
비록 서발턴 현실주의적 시각이 내부적 위협을 강조하고 있지만, 꼭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위협만을 안보문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서발턴 국가의 영토, 제도, 집권 세력은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문제에 모두 위협받을 수 있다. 다만, 제3세계 국가군에 속하는 국가들의 경우에는, 그 특성상 국가형성 단계에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외부적인 위협보다는 국가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위협에 더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발턴 국가는 완전한 영토적·제도적 구조를 확립하지 못한 탓에 분리주의, 반란, 국가전복, 테러 등의 위협에 자주 그리고 쉽게 노출된다. 이러한 내부적 위협들은 국가형성을 주도하는 집권세력(governing regime)의 정당성을 약화하는 한편 국가형성에 있어 필수적인 사회적 통합과 응집력을 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발턴 현실주의가 규정하는 안보의 대상은 국가의 영토적·제도적 구조와 그 국가의 집권세력이라 할 수 있다. 아윱이 서발턴 현실주의를 새로운 이론이 아닌 보완적 시각이라 한 이유는 그의 이론이 이처럼 여전히 국가만을 국제정치(안보)의 대상으로 보는 국가중심적 이론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윱은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 중 인구(population)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인간안보(human security) 학자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안보 개념이 폭력과 궁핍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을 안보로 정의함에 따라 보편적인 개인(인간)들을 안보의 대상으로 여긴다면(Kerr 2013: 104-108), 서발턴 현실주의는 여전히 국가의 영토적·제도적 구조 내에 속한 개인(들)의 생존과 안전에만 관심을 둘 뿐이며, 그마저도 인구의 안보가 국가의 영토, 제도, 통치권력체의 안보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질 때에만 중요하게 여긴다.
약소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일수록 국가안보와 정권안보가 더 동일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엔이 인정하는 193개의 – 비독립 국가를 합할 경우 200개가 넘는 – 국가 중 소수의 선진국 그리고 물질적 자원을 보유한 개발도상국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약소국은 대외적인 위협보다 국가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국내적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는 제도적 장치와 영토적 경계가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통합과 응집력은 약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통치권력의 안보 역시 취약한 상태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취약한 상태에 놓인 정권이 자신의 안보와 권력을 강화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정권안보를 위협하는 내부적 문제들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Jackson 2013: 162-163). 약소국의 이러한 ‘불안 딜레마(insecurity dilemma)’가 정권안보와 국가안보를 하나로 묶는 매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불안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는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다시 말해, 서발턴 국가의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제3세계 약소국의 불안 딜레마를 분석한 잭슨(Richard Jackson)은 약소국이 국가의 세 가지 기본 요소를 갖추지 못할 때 불안 딜레마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효과적인 제도, 폭력 수단의 독점, 그리고 국가 관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다(Jackson 1990). 이러한 요소를 갖추지 못한 국가는 불완전 (incomplete) 혹은 준(quasi) 국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이 국가의 정권은 끊임없이 내외부적 위협에 시달린다. 비슷한 맥락에서 약소국을 분석한 또 다른 연구는 국가의 권력을 전제적 권력(despotic power)과 기반 권력(infrastructural power)으로 나누어 국가의 제도적 역량을 평가하는데, 여기서 전제적 권력은 국민에게 규칙을 부여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능력을 의미하며, 기반 권력은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국가 제도의 합법성 및 효율성과 관련이 있다(Thomas 1987). 약소국은 이 두 가지 권력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특히 약소국일수록 약한 기반 권력으로 인해 전제적 권력에 더욱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잔(Barry Buzan) 역시 국가의 세 가지 필수 구성요소로 물리적 기반, 제도적 역량, 그리고 국가 관념을 꼽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국가 관념의 요소에 주목한 그는 국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만 국가가 성립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유지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가를 약소국으로 구분한다(Buzan 1991). 한편, 국가권력을 연구한 또 다른 학자는 국가권력을 지도자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국민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능력으로 정의하면서도, 국가 내 사회가 그러한 지도자의 권위와 권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역시 국가권력을 측정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Migdal 1998). 더 나아가 약소국일수록 국가 대 사회 간 대립이 강하게 나타나며, 그러한 국가 대 사회 간 내부적 세력균형이 약소국이 서구적 주권국가 형태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한다.
한편, 아윱은 제3세계 국가의 안보적 취약도를 평가하기 위해 아잘(Edward Azar)과 문정인의 연구를 원용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를 분석하는 데 국가안보의 세 가지 차원, 즉 위협(안보 환경), 하드웨어(국가 능력: capabilities) 그리고 소프트웨어(정당성, 통합, 정책역량)의 상호작용에 집중한 이들의 연구에서 아윱은 특히 안보 소프트웨어의 세 가지 구성요소인 국가의 정당성, 통합 그리고 정책역량이 제3세계 국가의 안보적 취약도를 측정함에 있어 중요한 변수라고 주장한다(Ayoob 1995: 11). 국가의 정당성, 통합 그리고 정책역량의 정도가 약할수록 국가의 안보적 취약도는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국가안보의 하드웨어 차원에서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자랑하는 국가일지라도 정당성, 통합, 정책역량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하다면 얼마든지 제3세계 국가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안보적 취약성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정확히 어떤 국가가 서발턴 국가로 분류될 수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로 취약한 안보를 가진 국가이어야만 제3세계의 서발턴 국가로 분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윱은 제3세계 국가들이 가지는 다음의 공통된 특징을 제시한다(Ayoob 1995: 15): (1) 제3세계 국가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과 인종적·지역적 갈등으로 인해 내부적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이다. (2) 국경과 제도 그리고 통치 권력체의 무조건적인 합법성을 갖추지 못한 국가이다. (3) 내외부적 갈등과 물리적 충돌에 취약한 국가이다. (4) 기형적이고 의존적인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경험하고 있는 국가이다. (5) 국제안보 및 경제 문제에서 소외된 주변화된 국가이다. (6) 선진국, 국제기구, 초국적 기업 등 외부 행위자들의 침투에 취약한 국가이다. 이를 종합하면, 제3세계 혹은 서발턴 국가는 약하고(weak), 공격받기 쉬우며(vulnerable), 불안정한(insecure) 국가를 의미하며, 따라서 강력한 물리적·강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라 할지라도 정권의 정당성과 내부적 통합에 지속적이고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면 안보적 취약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 Ayoob, Mohammed. 1995. The Third World security predicament: statemaking, regional conflict, and the international system. London: Lynne Rienner Publishers.
- Ayoob, Mohammed. 2002. “Inequality and Theorizing in International Relations: The Case for Subaltern Realism”, International Studies Review, 4:3. pp.27-48.
- Kerr, Pauline. 2013. “Human Security”, in Contemporary Security Studies, 3rd edn, edited by Alan Colli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104-116.
- Jackson, Richard. 1990. Quasi-States: Sovereignty,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Third World. New York: Cambridge Univerisity Press.
- Jackson, Richard. 2013. “Regime Security”, in Contemporary Security Studies, 3rd edn, edited by Alan Colli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162-173.
- Buzan, Barry. 1991. People, States and Fear: An Agenda for International Security in the Post-Cold War Era, 2nd edn. London: Harvester Wheatsheaf.
- Thomas, Caroline. 1987. In Search of Security: The Third World in International Relations. Boulder: Lynne Rienner.
- Migdal, Joel. 1988. Strong Societies and Weak States: State-Society Relations and State Capacities in the Third Worl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