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의 무정부상태 조직원리는 평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상위 권위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상호 동등한 위치와 권위를 인정하며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정부상태 조직원리에서 무정부성만을 보자면 국제관계는 주권국가들이 수평적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국제정치를 볼 때, 초국적 정부가 부재한 것은 맞지만 국가간 관계는 절대 수평적이거나 평등하지 않다. 강대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의 주권을 줄곧 침해하거나 억압하고, 약소국은 강대국에게 자신의 주권 일부를 강탈당하거나 의도적으로 양도함으로써 생존과 같은 핵심이익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국제질서는 현실적으로 위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국제정치의 조직원리는 무정부상태가 아닌 위계상태인가? 아니면 무정부상태라는 조직원리 위에 위계성이라는 운용원리가 작동하는 상태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권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국제정치는 기본적으로 ‘주권국가간 정치’를 의미하며, 따라서 주권국가는 국제정치를 가능케 하는 일차적 행위자이자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다. 흔히 주권국가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과 함께 탄생한 정치 단위체이며 주권의 개념 역시 이 조약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세워졌다 여겨지는 주권원칙은 크게 불간섭과 평등의 원칙으로 나눌 수 있고, 이는 다시 대내적 최고 권위성의 원칙, 대외적 독립의 원칙 (조약체결의 원칙), 영토성의 원칙, 상호인정의 원칙이라는 하위 원칙들로 나눠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최고 권위의 원칙이란, 국가가 자신의 법적-영토적 영역 내에서 최상의 권위의 원천이며 최종 결정권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또는 국가가 자신의 영토 밖의 다른 모든 사회적 제도에 대한 제한되지 않은 권력을 갖는 것을 최고 권위의 원칙이라 할 수도 있다. 대외적 독립의 원칙은 국가가 대외적인 어떠한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된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국제체제 내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결정할 권리를 가짐을 의미한다. 영토성의 원칙은 앞서 설명한 최고 권위성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규정하는 원칙이다. 마지막 상호인정의 원칙은 이렇게 최고 권위성의 원칙과 대외적 독립의 원칙 그리고 영토성의 원칙이 국가간 관계에서 상호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결국, 주권이란 국제체제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관계에 평등성을 적용해 모든 국가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이러한 지위가 상호적으로 침해받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규칙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국제정치의 조직원리가 마냥 무정부상태가 아닌 위계적 상태라고 한다면, 주권 개념에 대한 수정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조직원리로서 무정부성을, 운용원리로서 위계성을 인정한다면 국가주권의 개념을 딱히 수정할 필요는 없다. 현실 국제정치에서 권력이 주권을 빈번하게 침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의 주요 원칙들이 권력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주권의 여러 원칙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절대적이고 합당한 원칙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주권의 핵심 원칙들이 시기와 환경 그리고 해당 행위자간 관계에 따라 수용되는 정도를 달리했을 뿐이다. 따라서, 베스트팔렌 신화에서 비롯된 주권의 원칙들을 절대적이고 정태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라는 존재는 국내주권, 법적 주권, 상호의존주권, 베스트팔렌 주권을 갖지만, 이 네 주권의 실질적 행사력은 상황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한다고 주장한 크래스너(Stephen D. Krasner)의 주장은 주권의 상대성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주권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무정부적 국제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 역시 가능하다. 위계론자들은 무정부상태를 위계적 상태에 반대되는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에 ‘정당한 권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일반(archy)’로 봄으로써, 최종의 권위체로서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국가의 주권적 기능이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제한되고 양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이크(David Lake)는 국가들이 대내외적 최고성과 내정불간섭의 주권을 갖는 것은 맞지만, 현실에서 강대국과 약소국들은 각자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자발적 계약을 통해 주권 일부를 양도하거나 취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세력균형, 동맹, 편승 등은 모두 국가의 자발적 계약에 따른 주권의 양도 혹은 취득 행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약소국이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주변 강대국과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그 약소국의 주권이 아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권 일부를 양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조직원리를 무정부상태로 보는 한편, 국가의 주권은 본질적으로 평등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일정한 정도의 양도가 이루어지면서 국가간 위계적 질서가 형성된다는 식의 이해가 가능하다.
위계론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국제체제의 조직원리 자체를 위계적 상태로 봐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위계라는 것은 지배-종속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데, 이러한 이분법은 국력의 차이가 분명한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관계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국력 차가 매우 좁거나 거의 없는 국가간 관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국가 간 힘의 분포에 기초해 ‘계약적 위계성’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가지는 한계와도 관련이 있다. 한편, 두 국가 간 국력차가 분명하지만 정당한 권위에 대한 상호인정이 없을 때도 역시 위계라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위계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쌍방의 지위에 대한 일종의 인정과 존중의 여부인데, 만약 그러한 지위에 대한 인정이 부재하다면 그 관계는 한 쪽의 상대적 권력 우위로 인해 둘 사이의 질서가 완전히 무시된 단순 지배-종속관계일 뿐 위계적 관계로 보기 어렵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단순히 힘의 배분, 즉 국가 간 상대적 세력배분에 따라 결정되는 국가서열의 측면만 두드러진다.
한편, 국제정치의 운용원리로서의 위계성에서 국가서열은 분명 중요하다. 다만, 상대적 국력이 국가서열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서열은 물질적 국력과 더불어 그 서열에 대한 만족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서열과 관련하여, 세력전이론 이론가로 알려진 오간스키(A. F. K. Organski)는 국제체제를 국가 간의 서열이 존재하는 위계적 구조로 보았는데, 이러한 위계체제는 국가 간 상대적 세력배분 뿐만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국가들의 만족도 역시 보여준다.
오간스키는 국가들을 만족과 불만족 국가군으로 나누어 구별한다. 만족 국가군에는 현존질서를 지배하는 패권국과 그와 동맹관계에 있는 일부 강대국들이 있으며, 현존질서에 불만을 품고 있지 않는 일부 중견국 및 약소국들이 있다. 반대로 불만족 국가군에는 패권국과 현존질서에 강한 반감과 불만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간스키는 이들 불만족 국가들이 패권국의 지배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만, 국력의 열세로 인해 패권국 주도의 현존질서에 일시적으로 순응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존질서를 지배하는 패권의 힘이 약화되거나 불만족 국가군에서 패권국의 우세적 지위를 위협할만한 국력을 가진 도전국이 등장할 경우, 갈등과 경쟁을 내포하는 세력전이 구조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존 국제질서의 위계성에 대한 ‘만족’ 변수는 위계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지위’에 대한 상호인정 존중의 문제와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현존하는 국제질서의 위계적 구조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면 그 질서의 위계성은 약화되며, 반대로 만족도가 높다면 위계성 역시 강화된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오간스키는 패권국의 우세적 지위를 위협할만한 도전국이 물질적 국력 증진을 통해 등장하게 될 때 세력전이를 통한 위계적 질서의 변화가 발생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여전히 상대적 국력으로만 국가서열을 측정하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력의 증진이 오간스키가 말하는 산업화나 경제성장 같은 내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동맹이나 전쟁 같은 외부적 요인과 더불어 연성 권력 혹은 규범 같은 요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국가서열의 차원에서 위계성을 찾는 시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