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에 있어 홉스(Thomas Hobbes)의 사상은 투키디데스나 마키아벨리의 사상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홉스의 사상 중에서도 특히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그가 말한 자연상태(state of nature)는 현실주의가 강조하는 ‘무정부’, ‘권력정치’, ‘생존 추구’, ‘두려움’ 등 핵심적인 전제조건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홉스가 이야기하는 자연상태란 무엇인가? 홉스의 국제정치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연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홉스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홉스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욕망(passion)임을 강조하면서 인간이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그리고 인간의 영속적인 욕망은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미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할까? 이 질문은 홉스의 인간 본성에 대한 분석 중 ‘평등성’에 관한 내용과 연결되는데,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며 이러한 평등한 조건이 인간 개인 간 상호불신을 낳는다. 즉,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능력은 평등하므로 어떤 동일한 대상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서로 비슷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의 자기보존은 다른 비슷한 능력의 개인에 의해 얼마든지 침해받고 파괴될 수 있기에 서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는 선제공격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자기보존의 목적을 달성하는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권(right of nature)’, 즉 인간이 자기보존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있는 권리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 즉 자연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불신과 경쟁 그리고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하므로 그 삶은 항상 비참하고 궁핍할 수밖에 없다. 다만, 홉스는 인간에게는 이런 비참한 삶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존재해 평화를 갈망하게 되며, 이를 이루고자 이성에 따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연권 일부를 포기하는 원칙, 즉 ‘자연법(law of nature)’을 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상호 간 일정 부분 포기하거나 양도함으로써 삶이 고달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홉스는 이를 인간 개인 간의 사회계약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개인 간 자연권의 포기나 양도는 강제적 힘이 없다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들의 사회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권력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코먼웰스, 즉 ‘국가’이다. 그리고 국가라는 강제권력체는 주권자(sovereign)로 대변되어 개인들이 상호 간 자연권의 포기와 양도 계약을 지키지 않을 때 마땅히 처벌함으로써 개인들이 두려움에 의해 계약을 준수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은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게 된다고 홉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만듦으로써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보존의 목적을 완벽히 성취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홉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는 인간이 국가에 속하게 되면 인간사회의 자연상태는 벗어날 수 있지만, 리바이어던 간의 자연상태, 즉 국제적 자연상태에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홉스는 역사를 통해 원시적 인간사회가 국가들의 사회로 변화한 이후에도 국가의 주권자는 자국의 독립과 생존을 위해 서로 끊임없이 경계하고 공격 자세를 유지하는 전쟁준비상태, 즉 자연상태에 머물러 왔다고 주장한다. 홉스의 이러한 관점은 국내사회를 근거로 국제사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국내적 유추’ 개념의 토대가 된다. 국내적 유추란 ‘국내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유추하여 국가들에 적용하는 것’으로서 자연상태에서는 국가 역시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현실주의가 강조하는 무정부적 국제관계의 비극을 설명하는 이론적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국내적 유추 개념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무정부 상태에 놓인 국가의 삶은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처럼 비참하지 않다. 홉스는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에 속하게 된 개인은 국가의 보호 덕분에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를 돌려 생각해보면, 국가라는 존재는 무정부적 자연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자연권 일부를 양도한 개인들의 삶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풍요롭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홉스 역시 국가는 국방력을 키워 외부의 공격을 억지하거나 이에 대응할 수 있으므로 인간처럼 취약하지 않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어 자연상태에서의 국가의 삶이 인간의 그것만큼 비참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국가는 인간과 달리 능력의 면에서 상호평등하지 않음으로 상대적 권력차에 의한 일종의 위계적 서열이 형성되기 때문에 국가의 자연상태는 인간의 자연상태보다 비교적 덜 비참하고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국가는 패권국 혹은 강대국과 자신의 권력차를 인식하여 애초에 권력투쟁을 포기함으로써 최소한의 주권을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 자연상태를 인간의 자연상태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게 한다. 홉스가 말처럼 모든 조건이 평등한 인간들은 자기보존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선제적 공격을 감행하지만, 반면에 모든 조건이 평등하지 않은 국가들은 자기보존을 위해 더 강한 국가에게 자신의 권리 일부를 양도하는 행태를 보일 때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권국가는 원칙적으론 평등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국력의 차이로 인해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둘째, 자연상태에서 국가의 자연권은 인간의 그것에 비해 더 제한적이다. 먼저, 홉스는 코먼웰스의 군주들 역시 끊임없이 상호 불신과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코먼웰스의 자연상태를 끝내기 위한 초국가적 리바이어던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는 홉스 역시 초국가적 리바이어던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국가 간 무력투쟁이 억지 되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에서 국가도 인간처럼 자기보존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연권을 갖지만 다양한 이유로 인해 자연권 행사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먼저, 앞서 말한 것처럼 국가는 방어의 측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국력의 상대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보존을 위한 선제공격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는 자신의 자연권 일부를 초국가적 권력체가 아닌 다른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국가주권과 그 외의 가치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국가는 국내적 안정과 상호이익 등을 추구하기 위해 홉스가 말한 자연권 일부를 스스로 포기한 채 존재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자연권은 주관적이고 사적인 욕망과 이성에 따라 행사되는 반면 국가의 자연권은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욕망과 이성에 따라 행사된다. 자연상태에서 국가는 자기보존을 위해 인간처럼 자연권이 허락하는 모든 행동을 취할 권리를 갖지만, 그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국가는 개인들과 맺어진 사회계약이 파괴되지 않도록 할 의무를 동시에 진다. 국가는 자연상태에 놓여있는 주권자와 자연상태에 놓여있지 않은 다수의 국민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의 욕망과 이성 역시 두 차원에 걸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연상태에 놓인 주권자는 자기보존을 위해 권력의 극대화와 선제공격을 통한 안보를 추구하더라도 이미 자연상태에서 벗어난 국민은 삶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권자가 전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할 수도 있다. 만약 주권자가 국민의 보편적 의지를 무시한 채 사적인 욕망과 이성에 따라 행동한 결과 국민의 삶이 위협받는다면 그것은 주권의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주권자는 자연권 행사에 있어 국민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연상태에서 국가는 인간과 달리 무조건 욕망에 끌려 자연권을 행사하지 않으므로 내부구성원들의 집단적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행동을 규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제적 자연상태에서는 외부적 평화와 질서 그리고 내부적 안정을 모두 성취하려는 일반 의지가 어느 정도 작동함으로써 초국적 리바이어던이 없이도 일정 수준의 안정과 질서가 유지된다는 결론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국가는 로크(John Locke)의 자연상태의 인간상, 즉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더 닮았으며, 따라서 국제관계 역시 국가가 이성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권리와 소유를 필요에 따라 양도하거나 처분해 ‘평화, 선의, 상호부조 및 보존’을 추구하는 사회, 즉 자연법이 홉스의 자연상태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통용되는 상태로 볼 수 있다.